[기고] 공직사회, 법 만능주의에서 탈피해야
경향신문/2022-04-04
스릴러 영화 <콜>에서 주인공은 한 통의 전화로 과거를 바꾼다. 과거에 있는 다른 주인공이 전화를 받아 상황을 바꾸면, 즉시 현재에 반영되는 것이다. 영화 자체는 기분 좋은 내용이 아니지만, 누구나 이미 일어난 일을 바꾸는 상상은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공무원들이 일할 때 영화에서처럼 과거에 얽매인 현재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적극행정'이다.
공무원은 법률·대통령령 등에 근거해서 일한다. 이는 법치주의 국가에서 필요하지만 주의할 점도 있다. 법치주의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법 만능주의'이다. 공무원의 업무처리 기준이 되는 법령은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법령은 수시로 개정되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늘 과거이며,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기존에 공무원들은 법령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민에게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한편으로는 규정이 없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문화 때문에 무사안일·복지부동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적극행정위원회, 사전 컨설팅 등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위원회 등의 의견을 듣고 공익 목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면 법령에 맞지 않더라도 사후에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지난해 코로나19 백신 공급 과정에서 약사법 제48조에 의하면 백신은 안전성 문제로 유통 단계에서 개봉해 판매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포장을 개봉해 적정량을 판매하지 못한다면 남은 백신은 폐기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폐기 백신을 최소화하면서 의료 현장에 신속하게 공급하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질병관리청, 보건복지부는 협업을 통해 예외 조치가 가능하도록 했다. 약사법 제48조는 2007년 신설된 이후 개정이 거의 없었던 조항으로, 이는 과거를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행정을 한 사례가 되었다.
적극행정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법령 전반의 재점검이 필요하다. 특히 메타버스·드론·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는 분야, 감염병·자연재해와 같이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분야에서의 규제는 과감하게 정비해야 한다. 작년 대한상공회의소의 조사에 따르면, 신산업 규제를 경험한 기업 10곳 중 1곳이 사업을 포기했다. 기업들이 겪은 애로의 유형으로는 '근거 법령이 없거나 불분명한 경우'가 55.6%로 가장 많았다. 실질적 법치주의와 법 만능주의 사이에서 공무원이 균형을 갖추고 일하는 방식을 혁신해야 하는 이유이다.
넷플릭스의 최고경영자(CEO) 리드 헤이스팅스는 '규칙 없음 원칙(No rules rules)'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직원들은 '넷플릭스에 이득이 되게 일'하기만 하면 휴가나 출장, 경비도 자율적으로 쓴다고 한다. 공무원도 규칙이 없으면 더 창의적이고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특히 정부 인적 구성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MZ세대들의 동기 부여를 위해 더욱 중요하다.
지금까지 적극행정은 사후에 책임을 면제해주고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이 중심이 되어 왔다. 이제 공직 문화와 행태의 혁신이 필요한 시기다. 공무원들의 자긍심과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국민 눈높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행정을 할 수 있도록 공직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원본보기 : [기고] https://www.khan.co.kr/opinion/contribution/article/202204040300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