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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청] 봉선사, 도심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곳
2025-10-24
기관분류중앙행정기관 기관명국가유산청 작성자문경규 조회수38
작성자문경규
작성일2025-10-24
조회수38

 

봉선사, 도심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곳

안녕하세요. 국가유산청 대학생 기자단 2기 이효빈입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수도권 동북쪽의 산사인 ⛰️봉선사⛰️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수도권에 사시는 분들은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도 한적하게 거닐고 싶을 때, 다른 지역에 사시는 분들은 역사와 자연을 함께 찾고 싶을 때 근처의 국립수목원과 광릉과 함께 엮어서 방문하면 좋을 곳입니다. 봉선사는 천 년이 넘는 내력 그 자체만으로 방문할 가치가 있는 사찰입니다.

저는 9월 초 봉선사를 방문하여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문턱에 있었던 모습을 담았습니다.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화 수호의 중축이 된 역사를 조명하여 서울 경기 근교의 고즈넉한 자연과 어우러진 산사를 소개합니다.

🚌 교통편

저는 봉선사를 차를 타고 방문하였는데요, 대중교통 이용 시 수도권 1호선 의정부역과 4호선 진접역에서 버스를 타면 사찰 앞에서 바로 내리실 수 있으니 교통편에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버스가 자주 다녀서 교통편도 좋고, 등산하시는 분들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에요.

사찰 초입에서는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일주문이 반겨주었습니다.
 

봉선사는 일제강점기에 3.1 운동 만세 시위가 벌어진 장소입니다. 승려들이 시위를 계획하고 선언문을 제작하는 등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고 합니다.

👉 놓치면 아쉬운 깨알 정보 👈

경기도는 항일운동이 발생했던 지역에 안내판을 설치하여 그 의미를 기리고 있습니다. 아래 홈페이지에서 각 시, 군의 안내판 분포 현황을 확인할 수 있으니 일제강점기에 집중하여 경기 지역을 돌아보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봉선사의 내력

 

 

☑️️ 봉선사고려 광종 20년(969)에 창건된 운악사를 전신으로 하여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사찰입니다. 고려시대에 법인국사 탄문이 운악사를 창건한 이래로 조선시대에는 왕실과의 관계를 토대로 부흥하였죠. 16세기에는 교종본찰로 지정되어 전국의 신도들에게 교학을 전파하는 역할을 하며 그 격이 높아졌습니다. 대한제국 때에는 경기지역 사찰을 관장하는 중법산(中法山)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 봉선사 창건 공사에 참여한 학열 스님한글 창제에 참여한 신미 스님의 수제자입니다. 창건 후 신미, 학열, 학조 스님이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훈민정음의 보급을 위해 불전을 말로 해석하는 일을 도맡았다고 해요. 이 한글 역사 불사 도량의 전통은 근대를 넘어 현대에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아요.

조선 명종 때에는 이곳에서 승과평도 열렸습니다. 사찰 초입에 승과평 비석이 있어 승과를 치르는 예비 승려들의 모습을 상상(?) 해 보기도 했어요. 역시 유적을 방문할 때는 당대로 돌아가는 상상력이 필요하죠!

 

 

⚒️ 봉선사는 억불 정책과 전쟁 등으로 여러 건물이 수차례 재건되었습니다.

1551년 교종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었지만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국가의 원조로 복구하였으나, 또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소실되었습니다. 이를 1637년에 주지 계민 스님이 중창하고, 1749년에 재점 스님이 중수하여 대찰로 거듭났습니다.

☑️ 근대에는 월초 거연(月初巨淵)운허 용하(耘虛龍夏)가 교종본찰로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월초는 일제강점기 토지 사유화를 막기 위해 노력했고, 원흥사 터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세워 승려 교육에 이바지하였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는 봉선사 주지로서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삼성각을 신축하도록 하였습니다.

🍃 이런 변화 속에서도 수령이 500년이나 된 느티나무가 사찰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데요, 여러 화마 속에서도 살아남은 나무라니, 자연의 위대함을 새삼스레 체감하였습니다.

봉선사의 이모저모

🔍 이번에는 봉선사의 건물들을 돌아봅시다! 건물 중에서도 주목하면 좋을 곳은 ◇안을 채워서 ◆로 표시해 두었는데요, 건물의 순서는 돌아보기 편한 동선으로 작성하였다는 점 참고해 주세요! 저의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

◆ 봉선사 큰법당 ◆
 

✔️ 운허는 법당 중건 시 불경을 한글로 바꾸자는 취지를 반영하여 대웅전을 '큰법당'이라 이름하였습니다. '큰법당' 현판은 한국 사찰 법당 중 최초의 한글 현판입니다. 운허는 동국역경원 초대원장을 지내는 등 불경의 한글 번역과 불교 대중화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이는 예로부터 한글을 전승해온 전통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큰법당은 철근 콘크리트로 된 근대식 건축 방식을 도입하여 지어진 건물로, 1960년대에서 1970년대 한국의 근대 건축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답니다! 방문 당시 큰법당에서 백일 기도가 진행 중이라 안은 들여다볼 수 없었습니다.

큰법당 재건에 이어 한국전쟁을 거친 뒤 화엄이 범종각을, 운경 기흥과 능허가 운하당을, 월운 해룡이 개건당을 신축하도록 하며 사찰의 재건이 이어졌습니다.

 

◇ 운하당 ◇

봉선사 운하당은 신도들의 교육장소입니다. 건물은 ㄷ자 모양인데요, 정면('운하당' 현판이 있는 쪽)이 6칸, 측면('봉선사' 현판이 있는 쪽)이 5칸으로 상당한 규모의 건물입니다. 그만큼 과거 신도의 수가 많았을 거라고 짐작해 볼 수 있겠죠?

✔️ 봉선사라는 이름으로 바뀐 시점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광릉에 모신 때부터입니다. 세조의 명복을 기원하는 능침사(陵寢寺)로서 기능하도록 하고 이름을 변경하였죠.

이를 알고 사찰을 둘러보니 왕실과 관련되어 그 규모가 상당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었어요. 물론 지금은 당대보다 축소된 크기이지만요. 당시 봉선사의 규모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사료가 📖 김수온의 『봉선사기』입니다. 이에 따르면 전각과 행랑을 합쳐 89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왕실에서 관리한 사찰이니, 그 규모가 아무래도 상당하였을 것입니다.

 

 ◇ 관음전 ◇

⚒️ 관음전은 한국전쟁 때 전소되어 1999년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재건되었는데요, 저는 관음전의 단청이 참 화려하고 아름답더라고요. 탁월한 복원기술도 발견할 수 있었던 답사였습니다.

◆ 삼성각 - 「남양주 봉선사 칠성도」, 「남양주 봉선사 독성도」 ◆

 

 봉선사 삼성각 내부에는 경기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남양주 봉선사 칠성도」와 「남양주 봉선사 독성도」가 모셔져 있습니다.

 

 

 

✔️ 「남양주 봉선사 칠성도」칠성 신앙을 표현한 불화입니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칠성도는 1903년(고종 40)에 본래 원흥사에 봉안되었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 중앙에 치성광부처님의 뒤에 반짝반짝 빛나는 원! 바로 광배인데요🌟, 신광(神光)이 금박으로 되어 신비스러운 느낌을 더해줍니다. 이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 칠성을 상징하는 일곱 명의 부처를 배치하였습니다.

상단 색구름 속에도 부처가 있는데요, 이들은 별자리를 상징하는 ✨삼태육성(三台六星)✨입니다.

칠성도는 삼성각 내부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삼성각으로 들어가니 광배를 뒤로한 부처를 바로 마주하게 되어 절로 엄숙해졌답니다.

✔️ 독성도란 산수를 배경으로 혼자서 수행하는 존자를 그린 불화입니다. 「남양주 봉선사 독성도」의 화기(畵記)에는 별도로 조성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원흥사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에 더해, 칠성도를 이안하면서 함께 이안된 것으로 추정되어 조성시기를 1905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중앙의 '독성존자'의 머리 뒤에 원이 보이시나요?

이는 ✨ 두광(頭光)으로, 독성존자가 신성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존자는 왼손에 석장을, 오른손에는 영지(靈芝)를 들고 있습니다. 그림의 좌측에는 두 명의 동자가, 우측에는 진각거사(眞覺居士)가 있습니다. 이들 주위로 보이는 학, 소나무, 거북, 물, 바위 등은 십장생으로, 수복 장수(壽福 長壽)를 의미합니다.

칠성도가 엄숙함을 보여줬다면 독성도는 친근하게 다가왔는데요, 존자의 표정이 온화해 보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안(移安): 신주나 영정 따위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심.

*석장(錫杖): 불교에서 승려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

보물 「남양주 봉선사 비로자나삼신괘불도(南楊州 奉先寺 毘盧遮那三身掛佛圖)」는 공개되지 않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쉬우니 괘불도를 잠깐 보고 갈까요? ✔️ 이 괘불도는 18세기 괘불로, 당시 비단으로 괘불도를 많이 그리던 문화와 다르게 종이로 제작되었습니다.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이, 우측에는 노사나불이, 좌측에는 석가모니불이 표현되었습니다.

비로자나불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는 지권인 자세를, 노사나불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서 설법인을 하고 있으며, 석가모니불은 비로자나불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었어요.

*설법인(說法印): 두 손등을 어긋나게 마주대어 네 손가락을 서로 엇걸고 왼손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돌려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서로 끝이 맞닿도록 하는 부처의 손가락 자세.

 

 

◇ 조사전 ◇

조사전에는 근대 봉선사 주지스님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조사전은 개방되어 있는데요, 안에 들어가서 스님들께 잠시 인사를 드리고 나왔습니다.

◇ 지장전 ◇

 지장전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를 모셨던 어실각(御室閣)으로, 이 또한 1999년에 복원되었습니다.

 

◆ 보물 남양주 봉선사 동종 ◆

✔️ 범종루에 있는 보물 남양주 봉선사 동종(南楊州 奉先寺 銅種)은 🌟왕실의 발원🌟으로 1469년(예종 1)에 만들어진 동종입니다. 이 종은 조선 종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가장 상부에 용통이 없고 용뉴에는 두 마리 용🐉이 서로 등을 지고 종의 고리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 사진에 보시면 종의 몸통에 글자들이 보이시죠? 이는 종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것인데, 국가의 감독으로 만들어진 종이라는 점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조선 전기에 왕실에서 발원한 범종에서는 종신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발원자와 주성 까닭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절에 가서 조선 전기 범종을 보신다면 이런 명문을 찾아보시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명문은 세조의 공덕을 찬탄한 뒤, 세조 사후 예종이 광릉에 세조를 모시고 그 옆에 봉선사를 짓고 종 제작을 명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왕의 업적을 알리는 기능을 하므로 명문에 불교적 성격과 정치적인 측면을 모두 담았다고 해석할 수 있겠네요.

*용통(甬筒): 종의 음향을 조정하는 통.

*용뉴(龍鈕): 종 꼭대기의 장식.

 

◇ 당간지주 ◇

봉선사가 수차례의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찰의 입구에 있는 당간지주가 남아있어서 놀랐어요. ✔️ 봉선사 당간지주는 1469년에 세워졌습니다. 1551년(명종 6)에 승과평이 부활하면서 승과평을 치를 때 승과기(僧科旗)를 달아놓았다고 합니다.

 

 

봉선사에서 꼭 봐야 할 답사 포인트

✨동종, 연꽃✨

저는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봉선사에 가서 동종과 연꽃을 보면 봉선사를 다 본 것이다!

동종은 옛것 그대로 보존된 것으로, 왕실 발원문까지 적혀있어서 직접 보니 신기하였어요. 그리고 불교에서 깨달음, 열반 등을 상징하는 연꽃(연잎)이 봉선사에는 정말 많아서 눈이 정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주차장으로 돌아 나오는 길에 운 좋게도 지각한 연꽃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연꽃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며 속세에서의 제 품행을 돌아보는(?) 사색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심(心)을 경건히 다지고 올 수 있었던 봉선사 답사였습니다. 여러분들도 봉선사를 거닐며 번뇌를 떨쳐 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혹은 생활하시는 곳 주변에 사찰이 있다면 속세를 잊고 잠시 다녀오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