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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청] 민족사상 고취자,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발자취를 기억하며
2025-10-27
기관분류중앙행정기관 기관명국가유산청 작성자문경규 조회수19
작성자문경규
작성일2025-10-27
조회수19

백산 안희제 선생을 알고 계시나요? 혹은 백산상회에 대해 들어보셨을까요?

오늘은 여러분께 백산 안희제 선생과 안희제 선생이 설립한 백산상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그럼 바로 떠나보실까요-!

민족사상 고취자, 백산 안희제 선생

안희제 선생은 1885년 8월 4일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백산(白山)입니다.

안희제 선생은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했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러일전쟁(1904)과 일제의 을사늑약(1905) 강제 체결 이후 계몽주의*로 전환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신학문을 통한 자주 독립 사상 고취가 급선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계몽주의 :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으며 현존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시대적인 사조

국가가 망했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고서를 읽고 실행하지 않으면 도리어

무식자만 같지 못합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학문은 오히려 나라를 해치는 것이니

내일 당장 서울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해

국민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가히 공맹의 도라 할 수 있는데

어찌 산림 간에 숨어서 부질 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안국제 _ 백산공가장급유사약록

안희제 선생의 친동생 안국제가 쓴 “백산공가장급유사약록”(행장)의 기록에 의하면,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당한 울분을 참지 못한 안희제 선생은 부친과 조부한테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긴 후 서울로 떠났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1907년에는 양정의숙 전문부 경제과로 전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습니다.

교육 분야에 열의가 많았던 안희제 선생은 1919년 11월 후학 양성을 위해 기미육영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기미육영회는 매년 10명의 수재를 선발하여 중국, 일본, 미국, 유럽 등 해외로 유학을 보내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출범하였습니다. 국내에 대학이 없었기에 해외 유학생 파견을 장려하고 지원하는 일종의 장학 재단이었습니다.

안희제 선생은 1909년 10월 경 망국의 사태를 맞아 서울 남형우의 집에서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습니다. 대동청년당은 신민회처럼 새로운 국체 즉 공화정을 지향하며 국권회복을 추구한 조직이었습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발자취를 느끼기 위해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를 다녀와봤는데요!

의령군 입산마을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같이 살다간 백산 안희제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신학문을 통해 실력을 양성한 안희제 선생은 국권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는데요. 1900년대 초반 민족운동계에서는 민중의 각성에 입각하여 국권을 보존하기 위한 신교육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안희제 선생도 이러한 계몽운동의 흐름에 앞장섰습니다. 1906년 11월 동래 구포에서 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 설립에 참여했고, 1907년에는 의령에서 대지주 이우식의 지원으로 의신학교를, 1908년에는 고향인 이곳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애국 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고 합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생가 건물은 안채, 사랑채 2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채는 정면 6칸 팔작지붕집으로 앞뒤 툇간* 발달하여 길어진 측면의 길이와 조화를 이룹니다. 실내는 왼쪽에서부터 마루, 방, 대청 2칸, 방, 부엌 순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툇간 : 방 앞에 반반 칸 또는 반 칸, 한 칸 넓이의 마루를 구성한 부분

사랑채는 정면 4칸의 전후 툇간으로 구성된 3량 초가집으로 안채처럼 남측면에 마루를 두었습니다. 사랑채는 안채 정면에 안채와 같이 동향으로 배치하여 대지가 좁지 않은데도 안채와 바짝 붙어 있는데요. 두 건물은 모두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마루를 1칸씩 구성하고 있어 특이한 점입니다. 또한 다양한 기능을 가진 방이 필요함에도 별도의 건물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한 건물 내에서 해결하는 조선시대 후기 주택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고 합니다.

위 사진들은 2023년도에 제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었는데요. 2년이 지난 시점인 2025년에 아이폰 6S를 들고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옛날 감성으로 우리 국가유산을 직접 담아보고 싶었답니다. 화질이 좋지 않아도 감성으로 이해해주세요-!

생가를 취재했던 이 날에는 생가 옆집에 아직도 살고 계시는 후손 분께서 직접 투어를 시켜주셨었는데요. 후손 분은 안희제 선생의 동생인 안국제 선생의 손녀 사위 분이셨습니다. 직접 안희제 선생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생가 외에도 탐진 안씨 관련 유적들을 소개해주셨는데 너무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현재는 아쉽게도 생가 사랑채가 지붕보수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곧 공사가 끝났다고 하니 새 초가로 단장한 사랑채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유산 자료인 의령 상로재는 1772년(경종 2) 초창 이후 수차례 보수를 거쳐 1922년 중창된 건물입니다.

원래 탐진 안씨 조상을 기리기 위한 제사용 건물로 만들어졌는데, 상로재 중수기에 따르면 이슬과 서리가 내릴 때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조상에 대한 추모의 정을 가지며 군자의 도리로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뜻에서 '상로재'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상로재는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가운데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습니다. 가운데 2칸의 지붕은 옆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 人자 모양인 맛배지붕으로 양쪽에 작은 지붕을 달아내고 아래에 방을 두었습니다.

건축공간 구성의 위계성과 구조가 특이하고, 1908년 백산 안희제 선생이 본 건물에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문명개화를 이끌 인재를 양성한 역사성이 있어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의령 탐진안씨 문중 정려각도 입산마을에 함께 위치해있는데요. 생가 인근에 위치해있어 함께 다녀와서 담아보았습니다.

의령 탐진안씨 문중 정려각은 경상남도 문화유산 자료로, 조선 초 1405년(태종 5)에 문신 안도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지극한 효심으로 성심을 다한 것이 알려져 조정에 천거되어 하사받은 정려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지금은 6세대에 걸친 8효자와 열부 등 10분의 효행을 기린 분을 모신 정려각이지만, 초기에 7분의 효자를 모신 정려였기에 칠효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윤리와 가치관 등 사회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입산마을은 약 450년 전부터 터를 잡고 내려온 탐진 안씨 집성촌으로, 백산 안희제 선생을 비롯한 의병장, 독립유공자, 애국지사 등을 배출한 유서 깊은 역사마을입니다.

이러한 입산마을에는 경상남도 문화유산 자료인 너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의령 탐진안씨 종택도 함께 있습니다. 이번에 안희제 선생 생가와 함께 둘러본 장소였는데요.

의령 탐진안씨 종택은 안영제가 1906년에 지은 탐진안씨 헌납공파의 종가입니다. 건물의 배치는 안채를 중심으로 앞쪽에는 사랑채, 왼쪽, 오른쪽에는 곳간채와 중사랑채를 두어 전체적으로 ㅁ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안채의 뒤쪽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을 두었고, 사랑채 앞에는 대문채가 있습니다.

안채는 앞면 7.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옆에서 보았을 때는 여덟 팔 八자 모양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왼쪽부터 작은 방, 큰 마루, 안방, 부엌의 순서로 배치되었으며, 작은 방은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두고 그 아래 함실 아궁이를 만들었습니다.

입산마을에는 대대로 살고 있는 의령 탐진안씨 종택은 전통적인 상류 주택의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공간 구성을 통해 사용자의 편의를 배려한 점에서 1900년대 초반의 남부 지역 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취재하러 간 이 날에도 탐진안씨 종가의 후손 분들이 종택을 현대식으로 잘 가꾸고 있는 모습을 실제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안희제 선생은 나라가 망하자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 해외의 한인사회를 순방하며 민족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이갑을 만나 독립운동 방안을 상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자금 부족으로 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을 직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희제 선생은 1912년경 귀국하자 부산으로 이주하여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백산상회의 설립 시점은 여러 가지 관점이 있으나, 1913~1914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산상회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의 60% 이상을 조달하였습니다. 확인되는 사례는, 1918년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설산 장덕수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려 계획하였는데, 이 계획을 국내에 전하기 위해 귀국한 그가 동년 12월경 부산에 잠입하여 안희제 선생으로부터 3천원의 자금을 지원받았다고 합니다. 또한 백산상회는 국내외에 걸친 여러 상점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상점들은 민족운동가들의 연락 통신을 위한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백산상회는 설립 초기에 곡물, 면포, 해산물 등을 위탁판매하는 개인 경영의 무역상이었습니다. 안희제 선생이 소유 농토를 팔고 마련한 자금으로 설립한 것으로, 이후 1917년 11월 합자회사* 백산상회로 확대되었습니다. 1919년 5월에는 자본금 100만원의 백산무역주식회사로 전환되었습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내외국 물산 무역 및 위탁판매' 업체였습니다. 경주, 양산, 의령, 창원, 하동 등지의 대지주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지주자본이 상업자본으로 전환된 것입니다.

*합자회사 : 사업의 경영은 무한책임사원이 하고,

유한책임사원은 자본을 제공하여

사업에서 생기는 이익의 분배에 참여한다.

또한 중외일보를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운동과 만주 동경성에 발해농장을 설립하여 독립투쟁의 해외 근거지를 개척하였습니다. 1943년 일제에 의한 탄압과 고문으로 순국하는 그날까지 안희제 선생 삶 자체는 오롯이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다큐멘터리 영화 <백산-의령에서 발해까지>가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재개봉했다는 새로운 소식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안희제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며, 우리가 오늘날 광복 80주년을 맞이하기까지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의 피와 땀, 눈물이 있었음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