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제 선생의 친동생 안국제가 쓴 “백산공가장급유사약록”(행장)의 기록에 의하면,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당한 울분을 참지 못한 안희제 선생은 부친과 조부한테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긴 후 서울로 떠났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1907년에는 양정의숙 전문부 경제과로 전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습니다.
교육 분야에 열의가 많았던 안희제 선생은 1919년 11월 후학 양성을 위해 기미육영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기미육영회는 매년 10명의 수재를 선발하여 중국, 일본, 미국, 유럽 등 해외로 유학을 보내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출범하였습니다. 국내에 대학이 없었기에 해외 유학생 파견을 장려하고 지원하는 일종의 장학 재단이었습니다.
안희제 선생은 1909년 10월 경 망국의 사태를 맞아 서울 남형우의 집에서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습니다. 대동청년당은 신민회처럼 새로운 국체 즉 공화정을 지향하며 국권회복을 추구한 조직이었습니다.